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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的民宿居然是從這裏誕生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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很多人到韓國旅行的時候都會選擇傳統的韓國民宿居住,來更好的體驗當地的文化和傳統,今天我們就來聊聊關於韓國民宿前身”廂房“的那些事兒吧。

padding-bottom: 66.56%;">韓國的民宿居然是從這裏誕生的!

여행의 가장 큰 축은 잠자리와 먹거리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숙박 시설이 여행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잠자리, 먹거리, 오락 문화까지 오감을 아우르는 곳이며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지역 문화의 속살이라 칭할 만합니다.

旅行中最重要的就是吃飯睡覺了,甚至可以說包含了着兩種的旅館設施是旅行的全部了。睡覺,飲食,還有娛樂,滿足你所有需求的這個地方,顯示了待人接物的方式,能夠深刻充分體會當地的文化。

한국은 예로부터 ‘사랑채’라는 곳에서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한마디로 집주인이 거주하면서 손님이 오면 온갖 예를 다해 접대하는 장소인 것인데요. 조선시대에 확연히 드러나는 이 사랑채는 본채와 독립돼 지어지는 곳이라 중상류 계층의 주택에서 볼 수 있는 고급 양반 문화였습니다. 상하층, 남녀간의 구분이 엄격하던 당시엔 안채와 사랑채를 분리시켰으며 남자 주인은 사랑채에 머물며 자신의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한마디로 시대정신이 반영된 주거 문화의 화룡정점인 것입니다.

韓國從原來就有“廂房”來接待客人,總結下來就是主人家住的地方,如果有客人上門的話接待的場所。朝鮮時代開始出現的廂房,是和正房獨立修建的貸方,中上階層的住宅才能見到的高級的貴族文化,嚴格區分上下層,男女的當時社會,裏屋和廂房分開,男主人在廂房接待自己的客人。也就是反映了時代特點的居住文化的點睛之筆

가장이 거주하며 가족 생활의 일부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접객’을 위한 효율적인 활용이 매우 돋보였습니다. 특히 종가의 사랑채는 씨족 문화를 완벽하게 구현했는데요. 집성촌에서 가문을 대표하는 종가의 사랑채는 손님의 왕래가 잦고 일가친척 외에 다른 가문들의 방문도 많아 그야말로 현대의 고급 호텔을 방불케 했습니다. 당시의 손님은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 달 이상씩 머물기도 했으니 자연스레 접대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家長居住,家族生活的一部分也會在這裏開展,對於“待客”可是最有效率的利用。特別是宗家的廂房是宗族文化的完美體現。代表集成村的宗家的廂房除了經常往來的同家親戚之外海域很多其他家門也來訪問,這是就需要現代的高級酒店了。但是當時的k客人們短的一天兩天,長的話一個月以上停留,所以自然待客的文化也要按一個月來了。

사랑채에는 정갈한 잠자리와 음식, 그림과 책, 그리고 예를 중시하는 섬김의 미학이 조화를 이뤘는데 이를 잘 들여다 보면 한국 숙박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인들의 기품 있는 손맛으로 공간이 구성돼 풍류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기 가장 완벽한 구조이니 건축적 의미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廂房重要的是乾淨的牀鋪,食物,畫還有書,還有重視禮儀,會特別在意美學上的組合,這樣就形成了韓國的宿舍文化的根基。還有匠人們親手建造起來的能夠讓人享受風流,好好休息的最完美的構造,在建築的方面也是有很高的價值。

사랑채에는 연못과 화목으로 가꾼 정원이 존재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에 택지를 정해 인위적이지 않은 본래의 자연 그 자체를 끌어 들여 손님들의 피로를 풀어 주었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자연관은 집 안에서도 먼 곳의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었는데요. 건물은 자연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모습으로, 그 건축물 안에서 분합문을 열면 뒷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오도록 지어졌습니다.

廂房中蓮池和花木都在院子裏面存在,能夠享受韓國的風光的地方,不是人爲設定的而是原本自然自身來吸引客人,讓人疲勞頓消。朝鮮時代的書生們的自然觀是,在家裏也要觀賞遠方的自然。不在建築的設置景觀不協調的組合,而是在建築裏面打開分閣門,然後就可以一眼盡收遠山風景。

먼 곳에서 와서 당일로 돌아가기 힘든 손님을 위해 이불과 요강을 갖추고 한 주에서 길게는 수개월을 머물 수 있도록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사랑채의 서비스 문화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겨울이면 바람이 심해 온돌방의 온기가 쉬이 식기 때문에 집안의 귀한 어른들의 방에 보료를 깔아두는 문화가 있었는데, 여기서 귀한 어른이란 바로 사랑채를 찾은 손님들이었습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요즘의 서비스 구호가 무색할 정도인데요.

爲了遠方來當天很難返程的客人,被子和夜壺都有的準備的房間,讓客人可以長待甚至幾個月,提供牀位就是廂房的服務。朝鮮時代的冬天風力強勁,炕房的溫氣很快就會變量,所以家裏的長輩房間的會放置有皮褥,這裏的尊貴的長輩就是住在廂房的客人。“客人就是上帝”差不多跟最近這種服務的口號一樣了。

글짓기, 시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회’는 사랑채의 풍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요.당시 상류 사회는 시가 생활화되어 있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정신적 휴식을 취하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거문고를 거나 퉁소를 불며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요.

寫字,詩畫爲中心的“詩會”體現了廂房的風流,當時的上流社會,詩生活化,能夠給人帶來心理安定,精神上得到休息,不僅這樣,還有彈琴,吹簫各種讓人逍遙的方式。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림, 음악, 글이 함께 한 오감 만족의 문화가 바로 사랑채에서 뿌리를 내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역의 예술가와 문인들이 한 자리에 자주 모이는 곳. 이런 장소라면 결속과 친목의 장소를 넘어 한 지역 사회의 문화를 주도하고 트렌드를 창시하는 공간이라고 칭해야 할 것입니다.

通過這些,繪畫,音樂,書法等一起滿足五感的文化在廂房生根發芽。當地的藝術家文人都歡聚一堂的地方,這樣的場所不但是個團結和睦的場所,而且應該被叫做也是主導當地社會文化流行的空間。

한국에서 전해오는 옛말에 ‘사랑을 지킨다’는 게 있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손님의 방문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죠.

有一句流傳已久的韓語”需要守護愛”這句話說的是對於不知何時上門的客人的訪問,需要做好萬全的準備,

술, 밥, 차. 이 세 가지가 조선 시대 사랑채를 찾은 손님들에게 제공되는 기본 코스입니다. 특히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오는 비법으로 만들어진 가양주는 별미 중의 별미로 각 가정마다 술을 만드는 기술이 대단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랑채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 안채 부엌에서 만든 음식으로 접대를 하는 것이 보통이라 담소를 나누는 건 가장이지만 그에 곁들여질 음식과 다과를 수시로 내는 건 안채를 책임진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酒飯茶,這三樣是朝鮮時代,提供給廂房客人的基本套餐,特別是不同的家庭都有自己的祕製的家釀酒,各具風味,每家釀酒的技術都很厲害。廂房裏面不做料理,一般在內廳的廚房裏面做的食物來接待,雖然談笑作陪的一般是家長,但是在邊上斟茶倒水的卻是女性。

가장과 나누는 담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차 문화인데요. 잘 덖은 차에서 집주인의 안목과 취향이 한눈에 드러났고 향긋한 차 앞에서 나누는 한 편의 시로 세상 시름을 잊고 정서적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것입니다.

在聊天談笑中不能少的就是茶文化了,精製的茶,可以顯示主人的眼光和取向,一邊品味香茶一遍忘記世間凡事太過享受。

조선 시대 유교 문화에서는 안사람과 바깥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으므로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외부인인 손님의 방문이 이어지는 사랑채는 안채로부터 독립된 구조여야만 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독특한 주택 구조는 바로 이 사랑채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朝鮮時代的如家文化,內人和外人是不能一起的,所以只能內室和廂房分開。當然外部客人的廂房和內室要有獨立的構造,朝鮮時代獨特的住房構造就是廂房文化的根源。

사랑채는 안채와 시선이 차단되어야 했으므로 거리를 두거나 나무를 심어 물리적 분리를 하곤 했는데요. 물론 이렇게 독립된 건축물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재력이 담보되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상류층으로 갈수록 온전히 독립된 구조의 사랑채를 볼 수 있습니다.

爲了廂房和內室是視線阻斷,需要遠距離或者種植樹木來進行物理上的分離,當然爲了這樣建造獨立的建築物,財力是必須的。越是上層階級,就越能看到獨立的廂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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